01.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하여
빈센트 빌럼 반 고흐(1853년 3월 30일 ~ 1890년 7월 29일)는 네덜란드의 화가로서 일반적으로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놀라운 사실은 그는 자기 작품 전부(900여 점의 그림들과 1100여 점의 습작들)를 정신질환을 앓고 자살을 감행하기 전의 단지 10년 동안에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사후에 비로소 알려졌는데, 특히 1901년 3월 17일 파리에서 71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반 고흐는 흔히 탈 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되며, 또한 인상파, 야수파, 초기 추상화, 표현주의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며 20세기 예술의 여러 다른 분야에 영감을 주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은 반 고흐의 작품과 그의 동시대인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네덜란드의 또 다른 도시인 오테를로에 있는 크뢸러-뮐러 박물관도 상당히 많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
반 고흐가 그린 몇몇 그림들은 세상에서 가장 값어치 있는 그림들 사이에 순위가 매겨지기도 한다. 1987년 3월 30일에 반 고흐의 그림 '아이리스'가 뉴욕의 소더비즈에서 5390만 미국 달러라는 기록으로 팔렸다.
1990년 5월 15일에 그의 '가셰 박사의 초상'(첫째 판)이 크리스티 주기에서 8,250만 달러(한국 돈으로 약 580억원)에 일본의 다이쇼와 제지 명예회장 사이토 료에이(당시 74세)에게 팔림에 따라, 새로운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당시 사이토가 지불한 8,250만 달러는 낙찰가 7,500만달러에 경매가 구전 10%가 가산된 금액이다. 이후 '가셰 박사의 초상'은 미국의 수집가에게 4천 400만 달러에 다시 팔렸다고 한다.
02.
그의 어린 시절
(1853 ~ 1869)
빈센트 빌럼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주 쥔더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테오도로스 반 고흐(Theodorus van Gogh, 1822~1885)는 네덜란드 교회의 목사였으며, 어머니는 아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카르벤튀스(Anna Cornelia van Gogh-Carbentus, 1819~1907)였다.
빈센트 빌럼이라는 이름은 1년 전 사산되어 죽은 형의 이름이기도 했다. '빈센트'라는 이름은 레이던 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한 미술상이었던 그의 할아버지 빈센트(1789~1874)가 지어준 것인데, 반 고흐 가문에서 흔한 이름이었다.
빈센트의 어머니는 헤이그의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목사의 막내아들이었다. 둘은 빈센트의 이모 코넬리아가 테오도로스의 형 빈센트와 결혼했을 때부터 교제를 시작했다. 빈센트의 부모는 1851년 5월에 결혼했고, 곧이어 쥔더르트로 이사했다. 남동생 테오도뤼스 테오는 1857년 5월 1일에 태어났다.
그 외의 형제자매로는 코르넬리스 빈센트 코르, 엘리사벗 휘베르타 리스, 아나 코르넬리아, 빌레미나 야코바 빌이 있다. 그들의 사이는 그렇게 좋은 게 아니었던지라, 빈센트는 오직 빌레미나, 테오도뤼스하고만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빈센트의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은 여성으로, 주변에 항상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인물이었다. 아버지는 목사였기 때문에 적은 봉급을 받았지만, 아버지가 부임한 교회에서 가족에게 집, 하녀, 요리사 두 명, 정원사, 마차, 말을 제공하여 부족함이 없었다.
빈센트는 진지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고 전해진다. 집에서 어머니와 가정교사에게 가정교육을 받았고, 1860년에는 200명 정도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 성격의 쥔더르트 마을 학교로 보내졌다. 하지만 부모의 권유로 입학했던 기숙사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1861년부터 새로운 학교에 입학하기까지 3년 동안 그의 여동생 안나와 함께 가정교사로부터 교육받았다.
1864년에는 집에서 32km 떨어진 개신교 교사가 운영하는 제벤베르헌의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빈센트는 거기서 가족에게 버림받았다고 느껴서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떼를 썼다. 그러나 1866년에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집에서 멀리 떨어진 틸뷔르흐의 중학교로 보내졌다.
미술에 대한 관심은 이때 시작되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빈센트에게 그림을 그리라 권유했는데, 초기 그림들은 후대의 그림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빈센트가 틸뷔르흐의 빌럼 2세 국립중학교에 입학한 것도 파리에서 성공을 거둔 예술가였던 콘스탄트 코르넬리스 하위스만스(Constant Cornelis Huijsmans, 1810~1886)가 교사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위스만스는 기술적 완성도보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주는 인상을 포착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1868년 3월, 빈센트는 학교를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왔고, 빈센트는 후에 자신의 학창 시절이 "엄숙하고 차갑고, 무균적"이었다고 회고했다.
03.
그의 청년 시절
(1869 ~ 1876)
1869년 7월, 빈센트의 큰아버지 센트는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 빈센트를 위한 자리를 구해준다. 빈센트는 화랑에서 미술 교육받은 뒤, 1873년에는 런던 사우샘프턴가에 있는 구필 화랑 런던 지점으로 옮기게 된다. 빈센트의 제수인 조 반 고흐 봉거는 이 순간이 빈센트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빈센트는 20살에 아버지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어서인지, 일에 있어서 성취감을 느꼈다. 빈센트는 하숙하던 집주인의 딸인 외제니 로이어에게 푹 빠져 있었지만 로이어는 이미 전에 하숙하던 사람과 비밀리에 약혼했던 탓에 빈센트의 고백을 거절했다.
거절 때문인지, 빈센트는 자신을 가두고 종교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이후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1875년에 파리로 전근을 주선했고, 빈센트는 거기에서 미술상들이 미술품을 지나치게 상품화한다며 분개하여 결국 1년 후에 해고되었다.
1876년 4월, 빈센트는 영국으로 돌아가 램스게이트의 작은 기숙학교에서 무급 교사로 근무한다. 학교가 미들섹스의 아이슬워스로 이사했을 때, 빈센트도 함께 갔지만, 빈센트는 거기서도 잘 적응하지 못한다. 이후 런던의 선교단체에서 직업을 찾다가, 감리회 소속 목사인 토머스 슬레이트 존스(Thomas Slade Jones)의 조수가 된다. 빈센트는 토머스 슬레이트 존스 목사와 함께 궁핍한 사람들을 돕고, 설교도 몇 차례 진행한다.
그러나 빈센트는 거기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그 해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서는 큰아버지 센트의 주선으로 도르드레흐트의 서점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그 자리에 만족하지 못했고, 낙서하거나 성경의 구절을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번역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는 기독교에 몰두했고, 채식하며 검소한 식사를 하는 등 점점 더 경건한 삶을 추구하여 마치 수도승과 같은 삶을 살았다.
'미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술가]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 -3 (0) | 2023.01.23 |
---|---|
[예술가]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 -2 (0) | 2023.01.23 |
[예술가] '파블로 피카소'에 대하여 (1) | 2023.01.23 |
[작가] '장 줄리앙 : 그러면, 거기' 관람 전 인사이트 도출하기 (0) | 2023.01.22 |
[작가] '모네 인사이드' 관람 전 인사이트 도출하기 (0) | 2023.01.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