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폴 고갱'의 생애 -4

    01.

    다시 타히티로

     

    1895년 6월 28일 고갱은 다시 타히티에 도착했다. 그는 파페에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땅을 얻고 널찍한 화실을 갖췄다. 타히티의 저렴한 물가 덕분에 고갱은 말과 수레를 구할 수 있었고, 그가 원하던 식민지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고갱은 내키는 대로 파페에테와 자신의 집을 오갔다. 1901년 고갱은 스스로 《레 게페》(Les Guêpes, 말벌)을 창간하고 편집장이 되어 신문을 발행한다. 신문은 총독과 식민관료를 비꼬고 조롱하는 내용으로 가득했지만, 그렇다고 원주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원주민에게도 불편한 기사를 쏟아내곤 하였다. 타히티에 돌아온 첫 해 동안 고갱은 단 한 점도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목판화 몇 개만을 제작했다.

    고갱은 프랑스로 돌아간 동안 해변에서 술을 먹고 돌아다니다 병을 잘못 밟는 바람에 발목을 다치게 된다. 타히티에 온 다음 상처부위는 계속해서 통증을 줬고 다른 건강도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뿐만아니라 여전한 매독에도 불구하고, 원주민 여성을 상대로 성적 방탕을 그치지 않았다. 가끔은 이때문에 구속되기도 한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년 4월 그가 아끼던 딸 알린이 폐렴으로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이 달엔 그 동안 공짜로 쓰던 마굿간 부지가 팔려서 새로 마굿간을 지어야 했고, 살던 집을 보다 사치스런 목조 건물로 개조하려고 은행 대출까지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이런 일에 아랑곳 하지 않았고 결국 그해 말 은행은 거래 중지를 통지해 왔다.

     

    건강 악화와 딸의 죽음, 빚 독촉이 겹치자 고갱은 매우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이해에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제작한다. 고갱은 이것이 그의 마지막 대작임을 직감한다.

    1899년 가을 고갱의 파리쪽 딜러인 조지 쇼데가 사망한다. 그 동안 쇼데는 고갱의 그림을 사서 볼라르에게 되팔아 왔었다. 그런데 이제 쇼데가 사망하니 볼라르는 고갱과 직접 거래를 하고 싶어했다. 볼라르는 고갱에게 월 고정 수입 300 프랑을 제공하는 대신, 연간 최소 25점의 작품을 완성해야하며, 각 작품을 200프랑에 구매하는 것을 제안했다. 여기에 더해 볼라르는 고갱에게 화구와 물감을 제공하는 것을 제안한다. 

     

    볼라르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지만, 고갱은 이 제안을 따른다면 오랫동안 계획했던 마르키즈 제도 방문을 포기해야 했다. 고갱은 일단 계약을 맺고 생활비가 들어오자 약속을 어기고 마르키즈로 가기로 마음 먹는다. 타히티는 마땅한 흙이 없었기 때문에 도예 작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타히티 생활을 시작하며 고갱은 이웃집의 파우라와 동거했는데, 그녀는 고갱을 만났을 때 열네살이었다. 파우라는 두 아이를 낳았는데 첫째 딸은 어릴 때 죽게 된다. 둘째 아들은 파우라가 길렀다. 훗날 전기작가 메튜가 타이티를 방문했을 때에도 파우라가 낳은 아들의 후손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1919년 영국의 작가 윌리엄 서머싯 몸이 방문했을 때 파우라는 고갱이 아무런 금전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고 말했다.

     


    02.
    마르키즈 제도

    해변의 승마


    고갱은 태평양의 한 가운데 있는 마르키즈 제도야말로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전래의 식기와 무기를 쓰며 살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마르키즈에 도착하자마자 고갱은 그곳도 타이티와 별반 다를 것 없이 유럽화되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게다가 마르키즈는 서양인들이 가져온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18세기 8만여 명이었던 주민은 고갱이 도착한 20세기 초에는 간신히 4천여 명만이 남아있었다. 아이들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세운 미션 스쿨에 다녔고, 프랑스 식민 당국의 국가 헌병이 치안을 유지하였다. 

    1901년 9월 16일 고갱은 아투오나에 거처를 마련한다. 고갱은 가톨릭 선교회로부터 땅을 샀는데, 선교회의 주교는 고갱이 타히티에서 신문을 만들 때부터 가톨릭 편이었다는 말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그곳에는 개신교 선교회도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고갱은 개신교 목사와도 좋은 이웃으로 지냈다.

    태평양에선 사이클론이 잦았고 변변한 건물이 없는 원주민들은 자주 이재민이 되어 교회를 찾아왔다. 고갱은 베히네, 배오호(마리-로즈)와 같은 이들 원주민의 딸들을 건드렸다. 고갱의 매독은 그대로였지만 열네살 소녀였던 배이호는 건강한 딸을 낳았다. 배이호가 낳은 딸은 여전히 미르키즈에 살고 있다고 한다.

    11월이 되자 고갱은 배오호와 동거하였고 요리사와 하인을 두고 생활하였다. 고갱은 풍경과 인물을 그리고 여러 습작을 하며 보냈지만, 볼라르가 보낸 대리인은 타이티의 잃어버린 낙원을 주제로 한 그림을 계속 그릴 것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고갱은 이를 무시하고 마르키즈의 이웃 소녀들과 사람들을 그려 나간다.

    1902년 3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식민 당국은 고갱을 법정에 소환하였다. 타히티 생활을 하는 동안에 주거 침입 문제 등으로 척을 진 아마추어 화가 에드워드 찰리가 고갱을 고소했기 때문이다. 찰리는 고갱이 동거하였던 파우라의 가족이 자신의 집을 부수고 들어와 도둑질을 하였다고 주장하였고, 고갱은 자신이 운영하던 신문에서 찰리를 맹비난한다. 하지만 결국 고갱은 벌금을 납부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고갱의 병세는 지속해서 악화되었다. 고갱은 고통을 덜기 위해 모르핀에 손을 댔고 결국 중독되고 만다. 1902년 7월 베오호는 임신 7개월인 상태에서 고갱을 떠나 집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11월에 아이들 낳았지만 고갱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오랜 병마와 약물 중독에 시달리던 폴 고갱은 1903년 5월 8일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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