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그의
첫 작품
증권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873년 고갱은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파리 9구에 살고 있었는데, 근처에는 인상파 화가들이 모이는 카페가 있었다. 고갱은 카미유 피사로와 친분을 맺고 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고갱은 일요일에 피사로를 방문하여 채소밭에서 그림을 그렸다.
1877년 고갱은 "다리를 건너 빈곤층이 사는 신시가"인 보지라르 구역에 화실이 딸린 집을 마련하여 이사하였다. 그는 여기서 전직 증권 중개인이자 화가로 전업한 에밀 슈페네커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고갱은 '보지라르의 채소밭'을 1881년과 1882년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하였으나, 멸시당하게 된다. 하지만 이 그림은 오늘날 이 그림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882년 주식시장 붕괴는 미술시장 역시 위축시켰다.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취급하던 아트딜러 가운데 가장 큰 손이었던 폴 뒤랑 루엘 역시 큰 타격을 입었고, 고갱과 같은 신규 작가의 작품을 구입할 여력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갱은 2년간 전속 계약을 맺고 작업하였으며 느리긴 하지만 차츰 인지도를 쌓게 된다. 2년 동안 고갱을 피사로와 함께 작업하였으며, 간간이 폴 세잔과도 작업하였다. 1883년 10월 폴 고갱은 피사로에게 자신이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전업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으니 도와달라는 편지를 썼다.
이듬해 1월 고갱은 가족들과 함께 루앙으로 이사하였고, 루앙은 파리보다 집값이 싸지만 멀지 않아 여름이 오면 피사로를 만나러 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런 모험은 그해 말 메테가 아이들을 데리고 코펜하겐으로 가면서 끝이 나게 된다.
고갱은 1884년 11월 자기 작품과 도구를 코펜하겐으로 보내고 곧이어 자신도 아내에게 간다. 이때 보낸 작품들 몇 점은 아직도 코펜하겐에 소장되어 있다. 그들의 코펜하겐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고 고갱은 1년여 만에 파리로 돌아갔다.
02.
그의 프랑스 시기
1885년 ~ 1886년
고갱은 6살 난 아들 클로비스와 함께 파리로 돌아오고, 다른 아이들은 코펜하겐에서 메테가 키웠다. 당시 파리의 미술계는 다시 돌아온 고갱을 반기지 않았다. 겨울이 닥치자 고갱은 밑바닥 일들을 하며 혹독한 빈곤을 겪는다.
클로비스가 병을 앓게 되자 고갱은 누나 마리의 돈으로 아들을 기숙 학교에 입학시켰다. 1885년 한 해 동안 고갱은 몇 점 밖에 그림을 그릴 수 없었고, 1886년 8회차이자 마지막이었던 인상파 전람회에 고갱은 19점의 그림과 목판화를 출품하였다.
이때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루앙이나 코펜하겐에서 그린 것으로 새로 작업한 것이라곤 예전에 그렸던 '목욕하는 여인'의 누드 위로 옷을 덧입힌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펠릭스 브라크몽은 고갱의 작품을 하나 구입한다.
이 전시회는 당대 아방가르드의 선두로 평가받던 조르주 쇠라의 작품도 전시하였는데, 고갱은 쉬라의 신인상주의네 점묘법이니 하는 것을 경멸하였다. 이는 인상주의 전람회를 주선하고 쉬라를 초대한 피사로와 의견 대립으로 이어졌고 결국 둘은 절교하게 된다.
고갱은 1886년 여름을 브르타뉴반도의 퐁타벤에서 보냈다. 고갱이 이곳을 고른 이유는 무엇보다 물가가 저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에 젊은 화가들이 몰려든다는 것을 알아챘다. 고갱은 다혈질에 권투와 펜싱을 즐기는 사람이었지만 이 느긋한 휴양지에서 새로운 친분을 쌓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이 시기 고갱은 주로 풍경화를 그렸다. 퐁타벤의 화가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은 찰스 라발로 고갱에게 파나마와 마르티니크의 이국적 풍광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즐겼다고 한다.
이 여름에 고갱은 제8차 인상파 전람회에 출품하였던 피사로 화풍의 누드화를 찢어버리고 대신 '브르타뉴의 양치는 소녀'와 같은 풍경화를 그렸다. 당시 퐁타벤에는 영국의 랜돌프 칼데콧이 그린 삽화를 사용한 브르타뉴 여행안내서가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고갱은 이 안내서의 그림들을 의도적으로 따라 그렸다.
그러면서 새로 사귄 화가들처럼 보다 원색을 많이 쓰는 화풍으로 변화를 시도하면서 브르타뉴 지역의 소녀를 소재로 한 그림들을 그렸다. 이때의 그린 습작들은 나중에 파리로 돌아와 '네 명의 브르타뉴 여성'과 같은 작품을 제작하는 바탕이 되었다.
고갱은 라발의 권유대로 파나마와 마르티니크를 여행하였고, 여행 뒤엔 다시 찰스 라발, 에밀 베르나르, 에밀 슈페네커를 비롯한 여러 화가와 함께 퐁타벤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상징주의를 내세워 퐁타벤 화파를 결성하였다.
고갱은 인상주의가 상징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유럽의 전통적 화풍은 너무나 부족하다고 여겼고 아프리카와 동양의 미술이 가진 강렬함에 끌리게 된다. 당시 유럽에선 특히 일본의 채색판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1889년 벨기에의 화가 스무명이 결성한 레 베는 고갱의 개인전을 열었다.
03.
클루아조니즘과
종합주의
고갱은 민속 예술과 우키요에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 클루아조니즘에 동참하였다. 클루아조니즘이란 미술 평론가 에두아르 뒤자르댕이 에밀 베르나르의 작품을 평하면서 단색의 평평한 여백과 외곽선의 강조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화풍을 중세의 칠보(cloisonné) 공예에 빗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갱은 베르나르의 화풍이 그동안 찾아 헤매던 바로 그것이라고 느꼈고 이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고갱은 1889년 '황색의 그리스도'를 그리면서 클루아조니즘의 정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색상은 보다 원색적으로 표현되었고 두터운 외곽선으로 경계를 뚜렷하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 고갱은 전통적인 그라디에이션으로 명암을 나타냈기 때문에 외곽선으로 둘러쌓인 대상은 마치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처럼 보였다고 한다.
고갱은 자신의 화풍을 더욱 밀어붙여 이를 종합주의로 발전시켰다. 종합주의란 캔버스를 구성하는 각각의 색이 모두 동등한 역할을 맡아 어느 하나가 주되고 다른 것은 부수적인 것을 거부하는 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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