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네일 [예술가] '신윤복'에 대하여 01. 신윤복에 대하여 신윤복(申潤福, 1758년 ~ 1814년경)은 조선 후기의 관료이자 화가로서, 산수화와 풍속화에 특출났다. 양반 관료들의 이중성과 위선을 풍자한 그림, 여성들의 생활상을 그린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화공 가문 출신으로 화원 신한평의 아들이며, 그 역시 도화서 화원으로 종삼품 서반 무관(武官)인 첨절제사를 지냈다. 본관은 고령, 자는 입부(笠父), 덕여(德如)이고, 아명(兒名)은 신가권(申可權), 호는 혜원(蕙園)이다. 대표작은 미인도(美人圖)·단오도(端午圖) 등이 있다. 그는 조선 전기 시대의 문신 겸 학자였던 신말주의 후손이고, 일제강점기의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의 8대 방조가 된다. 02. 그의 생애 신윤복은 영조 34년(1758년)에 아버지 신한평과 어머니 홍천 피씨의 장남으..
썸네일 [예술가] '이중섭'에 대하여 01. 이중섭에 대하여 이중섭(李仲燮, 1916년 9월 16일~1956년 9월 6일)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서양화가로 호는 대향(大鄕), 본관은 장수이다. 이중섭의 작품에는 소, 닭, 어린이, 가족 등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향토적 요소와 동화적이고 자전적인 요소가 주로 담긴 것이 그의 소재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싸우는 소', '흰 소', '움직이는 흰 소', '소와 어린이', '황소', '투계' 등은 향토성이 진하게 밴 대표적 작품이다. '닭과 가족', '사내와 아이들', '길 떠나는 가족' 등 그 밖에 수많은 은지화는 동화적이고 자전적 요소가 강한 작품들이다. 02. 그의 생애 생애 초기 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작고하셔서 출생지인 평원..
썸네일 [예술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에 대하여 01. 디에고 벨라스케스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1599년 6월 6일 ~ 1660년 8월 6일)는 스페인의 화가이다. 대개 디에고 벨라스케스로 불린다. 바로크 시대 펠리페 4세(Felipe IV)때 궁정을 주도하던 화가였으며, 초상화에 유능한 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1629년에서 1631년의 1년 반동안 미술 공부와 여행을 위해 이탈리아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1649년 그는 다시 이태리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스페인 왕족 다수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유명한 유럽 의원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의 그림을 그렸다. 그의 걸작 중의 걸작은 바로 '시녀들(Las Meninas, 1656)'이다. 19세기의 초반 동안 벨라스케스의 작품..
썸네일 [예술가] '폴 세잔'의 생애 -3 01. 어둠의 시기, 파리, 1861~1870 1863년, 나폴레옹 3세는 Salon des Refusés라는 법령을 만들어Académie des Beaux-Artswere에 전시되어야 하는 작품들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작품 전시가 거부된 작가들 중에는 당시 혁신적이라고 평가받던 어린 인상파 화가들도 있었다. 세잔은 그들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사회적인 관계는 좋지 않았다. 이 시기에 그의 작품들은 어두운 색깔의 사용과 검은색의 비중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1859년 Aix-en-Provence 에 있는 École Spéciale de dessin에서 그리던 수채화들과 스케치들과는 크게 대조된다. 표현의 격렬함 또한 그의 이전 작품들과 크게 대비되었다. 1866~1867년에, Courbet의 ..
썸네일 [예술가] '폴 세잔'의 생애 -2 01. 그와 입체파 세잔은 자연을 단순화 시킬 때 기하학적 모양으로 변하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예를 들면, 그는 자연을 원기둥, 구, 그리고 원뿔로 다루고 싶어 했다. 게다가 '지각'의 진실을 포착하고 싶어 하는 세잔의 욕망은 두 눈으로 관찰하는 것을 생생하게, 혹은 살짝 다르게 해석하여 관객이 이전과는 다른 이상적인 관점으로 심미적 경험을 느낄 수 있도록 이끌었다. 이러한 세잔의 혁신은 비평가들에게 그의 작품들을 '망막, 맑은 시각, 그리고 증기 기관차의 영향'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02. 그의 작품 세계 세잔의 작품들은 1863년 Salon des Refusés에서 처음으로 전시되었지만, 전시된 작품들은 공식적인 Paris Salon의 배심원단에게 수용되지는 않았다. Salon은 세잔의 작품들..
썸네일 [예술가] '폴 세잔'의 생애 -1 01. 폴 세잔의 생애 폴 세잔(Paul Cézanne, 1839년 1월 19일~1906년 10월 22일)은 프랑스의 대표적 화가로서 현대 미술의 아버지이다. 세잔가는 이탈리아 피에몬테주 서부에 있는 '체사나'라는 마을에 살았다. 그들의 성 세잔은 본래 이탈리아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폴 세잔은 1839년 1월 19일, 남프랑스에 있는 액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태어나고 나서 약 한달 뒤인 1839년 2월 22일에는 그의 할머니를 대모로, 삼촌인 루이스를 대부로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인 루이스 아우구스테 세잔(Louis-Auguste Cézanne - 1798~1886)은 한 은행의 공동창업자였는데, 이 은행은 폴 세잔이 살아있는 동안 번창하여 폴의 경쟁자들에겐 불가능했던 경제적인 지원을 지..
썸네일 [예술가] '렘브란트'에 대하여 01. 렘브란트에 대하여 렘브란트 하르먼손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년 7월 15일~1669년 10월 4일)은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이다. 빛의 화가라고도 불리는 그는 일반적으로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판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특히 네덜란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이기도 하다. 예술 분야에서 그는 역사가들이 소위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라고 부르는 시대를 불러오는데 기여한 사람 중 하나이다. 렘브란트는 해외에 나간 적이 없지만, 이탈리아 거장들과 네덜란드 예술가들의 작품에 상당히 영향을 받았다. 초상화 화가로서 젊은 나이에 성공을 거둔 후, 렘브란트의 말년은 개인적인 비극과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특징지어진다. 그의 그림이 그의 평..
썸네일 [예술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에 대하여 01. 요하네스 베르메르 요하네스 베르메르 또는 얀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또는 Jan Vermeer, 1632년 10월 31일~1675년 12월 30일)는 바로크 시대에 활동했던 네덜란드출신 화가이다. 그는 네덜란드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네덜란드의 '황금시대'에 활동했던 화가이다. 델프트에서 살면서 작품활동을 했기 때문에 역사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와 동명 영화의 소재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베르메르의 작품은 옛 경매 기록상, 다른 작품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나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37점으로 작품의 규모는 아주 작은 편이다. 베르메르의 첫 번째 작품은 역사화였다. 하지만 그는 작품의 상당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장르화로 알려졌다.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썸네일 [예술가] '폴 고갱'의 생애 -4 01. 다시 타히티로 1895년 6월 28일 고갱은 다시 타히티에 도착했다. 그는 파페에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땅을 얻고 널찍한 화실을 갖췄다. 타히티의 저렴한 물가 덕분에 고갱은 말과 수레를 구할 수 있었고, 그가 원하던 식민지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고갱은 내키는 대로 파페에테와 자신의 집을 오갔다. 1901년 고갱은 스스로 《레 게페》(Les Guêpes, 말벌)을 창간하고 편집장이 되어 신문을 발행한다. 신문은 총독과 식민관료를 비꼬고 조롱하는 내용으로 가득했지만, 그렇다고 원주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원주민에게도 불편한 기사를 쏟아내곤 하였다. 타히티에 돌아온 첫 해 동안 고갱은 단 한 점도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목판화 몇 개만을 제작했다. 고갱은 프랑스로 돌아간 동안 ..
썸네일 [예술가] '폴 고갱'의 생애 -3 01. 마르티니크 1887년 파나마를 방문한 뒤 고갱은 친구 찰스 라발과 함께 마르티니크의 생피에르에서 체류하였다. 당시 고갱이 경험하고 느낀 것은 아내 메테와 친구 에밀 슈페네커에게 보낸 편지에 남아있다. 고갱은 돌아오는 여비를 아낄 셈으로 마르티니크에서 파산 신청을 하였다. 당시 프랑스에는 해외 식민지에서 자국 시민이 파산할 경우 귀환 여비를 지급하는 귀환 보장법이 있었다. 라발과 고갱은 돌아갈 배가 마련될 때까지 원주민들의 "껌둥이 움막"을 들락거리며 사람들을 관찰하고 하는 일 없이 뒹굴뒹굴하곤 하였다. 그러나 뜨거운 기후와 비가 새는 움막 생활로 인해 고갱은 이질과 말라리아에 걸리게 된다. 고갱은 생피에르에서 20점가량의 그림을 그렸고 특히 마르티니크에 정착한 인도인들의 힌두교 상징에 큰 관심을 ..
썸네일 [예술가] '폴 고갱'의 생애 -2 01. 그의 첫 작품 증권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873년 고갱은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파리 9구에 살고 있었는데, 근처에는 인상파 화가들이 모이는 카페가 있었다. 고갱은 카미유 피사로와 친분을 맺고 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고갱은 일요일에 피사로를 방문하여 채소밭에서 그림을 그렸다. 1877년 고갱은 "다리를 건너 빈곤층이 사는 신시가"인 보지라르 구역에 화실이 딸린 집을 마련하여 이사하였다. 그는 여기서 전직 증권 중개인이자 화가로 전업한 에밀 슈페네커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고갱은 '보지라르의 채소밭'을 1881년과 1882년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하였으나, 멸시당하게 된다. 하지만 이 그림은 오늘날 이 그림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882년 주식시장 붕괴는 ..
썸네일 [예술가] '폴 고갱'에 대하여, 그의 생애 -1 01. 폴 고갱에 대하여 폴 고갱 (1848년 6월 7일 ~ 1903년 5월 8일)은 프랑스의 탈 인상주의 화가이며, 파리에서 태어났다. 생전에는 그리 평가받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인상주의를 벗어나 종합주의 색채론에 입각한 작품을 남긴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생의 마지막 10여년을 타히티를 비롯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생활하며 작업하였고 이 시기 작품들이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고갱의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나 앙리 마티스와 같은 프랑스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고갱 사후 파리의 아트딜러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두 번의 유작전을 파리에서 개최하였고 이때 명성을 얻게 되었다. 고갱은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판화, 도예, 저술 등의 여러 방면에서 작품을 남겼..